정사년(1917년) 여름에 수해를 입고 버려진 집터 300여평중 222평은 물이 흐르는 하천부지로 변하였고(430번지), 일부는 도로가 되었다(430-1번지). 나머지 54평

(430-2번지) 181제곱미터는 그동안 찾지 않은 땅으로 이번에 측량을 하여 조상님이 살다 가신 흔적에 유혼을 기리고자 후손이 찾게 되었다.




인터넷 지도 옮김


실지 지적도면..예전에는 하천이 직강으로 흐르지 않았고,자연 그대로 곡선을 그리며 흘렀음을 알 수 있다.


황산1길 81번지 85번지.웃말로 이사하기 전에 거주하던 종택이다. 두번지는 원래 같은집이었으나 원명,복명 대에 이르러 가운데 담장을 치고 형제가 살았다.

81번지 옛 종택은 한옥 기와집으로 조리형 동향집이다. 뒤안에 작은 사당이 있다. 앞뒤가 가로 막혀 있어 전망은 그리 좋지 못하다.(1914년에 웃말로 이사)


옛 종택이 있는 황산 신씨 고가촌.


慎 炳 洪 (신병홍) 憲宗(헌종) 丁酉生(정유생)

28세손(1837~1917) 81

丁巳年(정사년) 628()

字 禹範(우범)

() 碧珍李氏(벽진이씨) 316()


慎 宗 嶽 (신종악) 戊午生(무오생)

29세손(1858~1927) 70

丁卯年(정묘년) 75()

字 汝五(여오). 號 芝岡(지강). 考友篤睦(고우독목).

文學深邃(문학심수).士友推重(사우추중).有遺稿見後錄(유유고견후록)

() 羅州林氏(나주임씨) 701()

() 慶州金氏(경주김씨) 628()

 

 

慎 才 晟 (신재성) 丙戌年(병술년) 112일생

30세손(1886~1957) 72

丁酉年(정유년) 826()

字 達瑞(달서). 號 雲庵(운암).

() 善山金氏(선산김씨) (1886~1917)

丁巳年(정사년) 624(31) ()

() 晋陽姜氏(진양강씨) (1901~1956)

丙申年(병신년) 426(56) ()

 

慎 昶 範 (신창범) 乙巳年(을사년) 125일생

31세손(1905~1961) 57. (22)

1961713()

字 元豪(원호). 號 淸江(청강)

() 晋陽姜氏(진양강씨) (1910~1997)

庚戌年(경술년) 1014일생

19971029(88) ()



아 그날이 생각난다.


때는 1917년7월17일 오전 11시경이다.

음력으로 정사년 유월 스무나흘 4대가 한집에 살고 있는 조용한 산골 마을에 집채보다 더 큰 시뻘건 황토물이 집을 삼킨다. 아! 어머니, 아버지, 할아버지

외마디 소리 낼 틈도 없이 야속한 물살은 거세게 거세게 몰아 붙이고 있었으니 창동 500년 이래 이보다 더한 변고가 어디 있으리오!


이 시대를 잠시 뒤돌아보면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이 전국을 통일하고 광무 9년인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내정 장악을 위해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그후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여 나라를 통째로 일제에

내어주었다. 나라 잃은 백성들의 탄식이 고을 고을을 뒤덮고 시일야방성대곡이 울려 퍼지던 암울한 그때 바로 일제치하다.


시조 공헌공 신  수 할아버님의 22세손 주,근,삼,제 네분중 막내집 梯(사다리 제) 조부님이 바로 우리집이다. 梯 조부님은 1659년에 태어 나셨다. 22세손부터

34세손까지 12대를 내려오며 원손으로 대통을 이어 온 宗家는 그리 흔하지 않다. 장장 360년의 家族史다. 23세손 수침, 수민. 24세손 원명, 복명. 25세손 성목,

성묵,성욱. 26세손 필직, 필설, 필헌, 필식. 27세손 재복, 재용. 28세손 병홍. 29세손 종악, 종식. 30세손 재성, 우성, 봉성. 31세손 창범,용범,주범,기준.

32세손 용길,용호. 33세손. 34세손.


父母千年壽 子孫萬代榮(부모천년수 자손만대영)이라. 대대로 내려 오면서 집안이 편안하고 자손이 번창함은 오로지 조상님의 높고 깊은 음덕 때문이다.

1914년 볕이 잘 드는 툇마루에 부자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가족 구성원의 나이를 보면 제일 어른인  병홍(77), 다음으로 종악(54), 재성(28),

창범(9)이다(1914년 기준). 전통적인 가부장제 아래서 의사결정권은 아마도 나이 순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당시 웃말에는 26세손 필직, 필설, 필헌, 필식 4형제 중에 우리집이 필직으로 제일 큰집이고 네째인 필식의 손자와 증손자인 병각,병진 형제와 종대가 살고

있었다. 이 댁의 누군가와 우리집의 병홍,종악과 마주 하였다. 기록이 없어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돌아가신 할머님이 전하는 말씀를 들어보면 서로 집을 바꾸었다

고 한다. 큰담 종택은 동향집으로 여름에 덥고 비좁았으며 더구나 앞뒤가 막혀 있어 전망은 그리 좋지 못하다.


웃말집은 지대가 높아 기백산과 현성산이 훤히 바라보이고, 옆에 물도 흘러 풍치가 좋았다. 종악은 대학자로 한시는 물론이고 문학이 심오하고 출중하였다.

이때 종악의 나이 54이라. 아버지인 병홍(77)과 의논하여 고민 끝에 이사하기로 하였다. 집안 어른들이 다소 진보적이고 진취적인 기상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함께 살고 있는 가족이 할아버님 병홍, 아들 종악 내외, 손자 재성 내외, 증손자 창범, 용범, 인동 고모로 8명의 대가족이다.


8대 종손 재성의 집이 1914년 웃말로 이사를 왔다. 웃말은 큰담보다 좀더 조용하고 아늑한 곳이다. 웃말은 동네 뒤쪽으로 해발 930미터의 호음산(일명 홍골)이

있다. 호음산 계곡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이 모여 원학천(위천천)으로 흐른다. 할아버님 아버님이 향교 출입을 하고 글을 하는 학자 종손 집안이라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없는 살림에 손님 맞으며 양반 체면 지켜 내느라 할머님들 고생이 많았음도 짐작이 간다.


1914년이 가고, 1915년, 1916년이 가고 1917년 정사년이 왔다. 이때 재성(증조부님)의 나이 32이고 증조할머님 선산김씨 할머님도 동갑인 32이다. 아버님 종악

(고조부님)58이고, 할아버님 병홍(5대조부님)의 나이 81다. 정사년의 무더위는 일찌기도 찾아 왔다. 찌는듯한 더위는 금방이라도 숨이 막힐 지경이다.

정사년 6월24일(음) 아침나절 11시경 벼락치는 소리에 놀라 마당에 나와 보니 황토물이 담을 넘어 밀려 오고 있다.


순식간에 집이 물에 둥둥 떠고 세간살이며 옷가지가 어지러이 떠 내려간다. 아 이 무슨 난리인고! 집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대대로 내려오던 서책이며

소중한 유물이 하루 아침에 흔적 없이 사라졌다. 어디 이뿐이랴! 5대조 할아버님 병홍(81세), 고조할머님 경주김씨 할머님(나이미상), 증조할머님 선산김씨

할머님(32세) 세분이 급류에 휩쓸려 돌아 가셨으니 슬프고 슬픈 일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고 온 천지가 개벽하는 일이로다.

통곡 또 통곡이니 어찌 그날을 잊으랴!


세상 사노라면 허망한 일도 많고, 억울한 일도 많다지만 이사와서 얼마되지 않아 사람 잃고, 집 잃고, 세간살이 잃고, 종가의 체통마저 잃었다.

남은 것은 집터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을 키를 넘는 바위덩이가 여기저기 보일뿐이다. 이때 재성의 아들 창범, 용범과 인동고모님 세분은 12살, 9살, 6살

이었다. 셋은 그 난리통에 하늘이 도우사 외가에 가서 화를 피했다. 재성의 아버지 종악은 재성이 옥양목 끈으로 허리에 동여 메고 감나무로 올라가서 겨우

목숨을 건졌다.


외가에서 집으로 급히 달려온 창범(조부님), 용범, 인동고모님의 심경이 어떠 했으랴. 아버지 재성을 부여 안고 한없이 한없이 서러워 목 놓아 울었다.

누구보다도 어머님 선산김씨가 32살의 꽃다운 나이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창범은 5척 단구의 체구이지만 담대하고 동네일을 내일처럼 도맡아 하신 어른이다.

12살 창범에게 그렇게도 다정한 어머니가 돌아 가셨다. 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 이 세상에 누구나 어머니라는 존재는 더 없이 크고도 넓다.


정사년 대홍수로 면내 금곡 마을에서도 여러명의 인명 피해를 냈다. 홍수나는 당일에 32살의 선산김씨(증조할머님)께서 돌아 가시고, 고조할머님 경주김씨

할머님과 병홍(5대조부님)은 시신을 나흘이 지난 6월28일에서야 하천 아래쪽에서 찾았다. 그래서 제삿날이 조금씩 차이가 있다. 당시는 일제시대라 묘를 함부로

쓰지 못하고 공동묘지에 쓰도록 되어 있었다.


묘를 공동묘지에 쓰지 않기 위해 삼밭(삼베를 짜는 원료인 삼나무를 당시에는 많이 재배하였음)에 임시로 염을 하여 두었다. 12살 창범은 자다가 얼마나

어머니가 보고 싶던지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앞 삼밭으로 향하였다. 아무리 어머니가 그리워도 한밤중에 시신을 혼자 보기가 그리 쉽지 않은데도 담대한 창범은

어머니에게 갔다. 홍수에 많이도 상한 모습에 그만 실신하고 말았다.


다음날 어둠을 틈타 몰래 지양골(정안동) 산 어귀에 어머님을 정성껏 모시고 내려 왔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산을 올라 갔는 데 여름철이라 어찌나 풀이

무성하게 자랐던지 어디가 어딘지 분간을 하지 못하고 애통하게도 묘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한이 되려니 만가지가 걸린다. 비통하게 젊은날에 가신 어머님을

양지바른 곳에 잘 모셔서 날며 들며 찾으리라 마음 먹었는 데 불효중에 불효로다.


12살 어린 나이에 32살 어머니를 잃은 창범은 가장 아닌 가장이 되어 집을 돌보아야 하였다. 다시 당시로 돌아가서 이때 재성의 나이 이제 32이다.

그래도 산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마음을 추스리고 다독여서 새장가를 띠밭말(모전) 진양강씨 할머님과 혼례를 치르고 진안군 부귀면에 이사 가셔서

사셨다. 나중에 무주면 개불리에도 사시고 새 증조할머님과 사이에 주범, 기준과 세분의 고모할머님까지 5남매를 두셨다.


전라도 진안과 무주에서 화전밭을 일구어 생활 하시고 갖은 고생을 다 하시었다. 그래도 선비의 체통은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시며 고고한 삶을 살다

가시었다. 한 세대의 침몰은 다음 세대까지 영향을 미쳐 용길, 용호, 순자, 용숙 세대에 고생을 바가지로 하였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무엇보다 삶을 팍팍하게

만들었다. 역사는 저기 저 물줄기처럼 쉼 없이 흐르고 흐른다. 사람은 나고 죽고 또 난다.


현재의 자손들 우리 자식들도 옛날 이야기는 재미 없어 한다. 그러나 묻히고 잊혀져 가는 가족사를 되세겨 봄으로써 조상님의 유혼을 기리고, 찬란한 다음

세대를 구상하여 봄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되어 글을 남긴다. 하늘에 계신 조상님들께 고합니다. 덕유산, 기백산, 현성산, 호음산 정기 받아 종가를 계승하고

수승대 물줄기처럼 천년만년 울울창창 우리 자손들 창성하게 하소서. 극락왕생 하시옵고 편안 또 편안하게 영면하소서.


2018년7월19일 웃말 옛 집터 모퉁이 남은 땅 측량하는 날이다. 하필이면 장마가 일찍 끝나고, 가마솥 찜통 더위로 연일 폭염 경보가 날아드는 한여름이다.

지난 주말 측량을 하리라고 집사람에게 이야기하고 고향에 올라온지 일주일이 지났다. 내일이면 조상님의 애환이 스며 있는 집터 측량하는 날이다.

(아버님께서는 단 한 번도 큰담에 있는 옛날 살던 종택 이야기도 웃말 집터 이야기도 하시지 않았다)


측량 하루 전날 꿈에 어떤 젊은 할머님이 담너머에서 빙그레 웃으시며 좋아 하셨다. 깨어 보니 새벽 3시다. 아마도 32살 꽃다운 나이에 가신 증조할머님께서

선몽을 하신 모양이다. 이제 이터를 측량하여 여름이 지나고 날씨가 선선한 가을이 되면 돌도 가려내고 흙도 골라서 조상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리고 싶다.

이글은 정사년 대홍수로 돌아가신 증조할머님, 고조할머님, 5대조 할아버님을 비롯한 조상님 영전에 바친다.


정사년(1917년) 홍수가 난지 꼭 100년이 지난 2017년에 지금의 종택을 새로 다듬고 옛 종택터를 찾았다.


*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이름 뒤에 할아버님이라는 존칭을 일부 쓰지 않았다.


* 정사년 수파 그후 100년이 흐른 2018.7.29 ... 東磵公 11代 宗孫.....東村...縡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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