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전함 (1)
여기는 첩첩산골 산 꼭대기에 있는 작은 암자이다. 크고 으리으리한 도심의 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초라하다. 이 암자에는 늙은 노승과 동자승
단 둘 뿐이다. 반가운 손님이 오려나 아침부터 참나무에 앉은 까치가 요란을 뜬다. "무정아 불전함 가저 오이라". 무정은 동자승에게 지어준 이름이다.
정 마저도 뚝 떼어 버리고 편하게 살라고 붙여준 이름이다. "네 스님" 무정이 불전함을 두 팔로 들고 들어 온다. "그래 한번 부어 보아라"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 노승과 동자승은 불전함을 뒤집어 보았다. 불전함에서는 천 원 짜리 두장이 나왔다. 노승과 동자승은 삐식이 웃는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든 동자승이 노승에게 "스님 시주가 얼마 되지 않사옵니다" "예끼 이넘아 이만하면 사흘은 거뜬히 살 수 있겠구만 얼마 안되다니" 그래도 동자승은
빡빡깍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겸연쩍어 한다. 걸어서 백리길은 가야 사람 구경을 하는 산골 오지 암자라 한 해 내내 통 틀어 오는 사람이 열도 되지 않는다.
"실망 말거라 이 또한 부처님의 뜻 아니겠나" "무정아 얼른 우물에 가서 새 물 한 바가지 떠 오너라" 부처님께 공양 올릴 시간이다. "비가 멈추면 뒷산
에 올라가 산나물이나 뜯자구나" 동자승이 물 한 바가지 가지고 오면서 "ㅎㅎ 스님 스님 우물가에 두꺼비가 두꺼비를 업고 다닙니다요"
"내버려 두어라 오늘 장가 가는 날인갑다 ㅎㅎ"
시와인드
(좌광천 2016)
불전함 (2)
다음날 노승과 동자승은 산으로 나물을 뜯으러 갔다. 이리 저리 수풀을 헤집고 노승은 잘도 나아간다. "어서 오너라 무정아" "네 스님 잠시 쉬었다 가시어요"
저만치 뒤에서 쌕쌕거리며 따르던 동자승이 거친 숨을 토해 낸다. 대꾸도 하지 않은채 노승은 더욱 걸음을 내 달리는데 자꾸만 동자승은 제자리 걸음을 하는
듯 마음만 급하다. 한참을 오니 암자는 작은 점이 되어 보인다. 산 마루에 걸터 앉은 노승이 먼 하늘을 본다.
"무정아 보아라 저~기" 무정이 아무리 보아도 도무지 보이는 것은 없다. 까치발을 하여 올려다 보아도 맹탕이다. 무정이 바랑망태를 벗어 젖히고
"스님 제 눈에는 아무것도...." 하며 난감한 얼굴을 들이밀자..........
"저 구름 말이다" 그제서야 무정이 한참을 바라본다."네 스님 제 눈에는 산 같기도 하고 나무 같기도 합니다" ..... "ㅎㅎ그려냐~ 잘 보았느니라~" ...
"본래 구름은 한가지 모양이 아니라 자꾸 변한단다. 보는 마음에 따라 이리도 보이고 저리도 보이고" ...무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스님에게 허리를 숙인다.
나물을 바랑망태 배가 뽈록하도록 뜯고서는 "무정아 뭐 요깃거리 없느냐?" 무정이 바랑망태에서 비닐 봉지 하나를 꺼낸다.......... "이것이 무엇이더냐?" ......
"예 삶은 감자 입니다요"
시와인드
(칠선계곡 2015)
불전함 (3)
노승은 자리를 훌훌 털며 일어난다. "무정아 노을이 아름답구나, 노을이 붉게 물들면 흉년이 든다는 데 걱정이구나" 동문서답에 어찌 할 바를 모르는
무정은 그냥 "네~네~" 만 읖조린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노승의 속마음이다. 바랑망태를 짊어 지고 일어 설 즈음 발 아래를 보니 사마귀 두놈이
싸움이 붙었다. 서로 몸체를 세워서 물고 뜯고 난리다.
신기하고 재미 있어서 천천히 살펴본다. 죽은 메뚜기 한 마리를 놓고 먹이다툼이 벌어졌다. 철 없는 무정이는 "스님 스님 어떤 사마귀가 이길까요.
저는 이넘이 힘이 세어 보입니다" 스님은 혀를 끌끌차며 "어찌 사마귀 싸우는 모습이 인간세상과 그리도 똑 같누" 한다. 서로 먹이 하나 두고 싸움질
하는 모습이 인간세상과 영판 닮았다. "무정아 그만 내려 가자꾸나" 노승의 승복이 펄럭이다.
성큼성큼 나아가는 노승이 오늘따라 활기차다. 눈을 감으면 깜깜하고 눈을 뜨면 환하다. 누가 이것을 모르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삼척동자 보다도 못한 육척 칠척 동자도 많음이다. 멀리서 바라보는 초라한 암자다. 아무리 초라해도 이 육신을 받아 주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암자다. 들고 있지 말고 놓아라 그러면 가벼워 질 것이다... "무정아 내일은 장에나 나가 보자꾸나"
시와인드
(구미 금오산 약사암 2015)
불전함 (4)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이 많다. 깊고 깊은 산중 암자라 달포만에 한 번씩 가는 장날은 노승과 동자승에게 나름
여행길이고 고행의 수행에서 잠시 쉬어가는 길이다. 그동안 산에서 뜯은 산나물이며 도라지 더덕과 몇가지 약재를 둘레메고 장으로 간다. 길다란
옥양목으로 끈을 만들어 어께에 메면 갈만하다. "무정아 오늘 장에 가거든 뭐 사 줄까나?" 무정은 아직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다.
깨춤을 추는 동자승의 모습이 그림 같다. 느티나무 그늘이 울창하여 쉬어가기 좋은 산마루 고갯길이다. 봇짐을 내려 놓고 쉰다. 이 고갯길은 장으로
가는 길목과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 서로 만나는 갈림길이라 오가는 사람들이 노승과 동자승 말고도 더 있다. 한양에서 지방으로 좌천되어 낙향하는
벼슬아치 무리도 있었다. 벼슬아치는 한양 졸부 아들넘으로 얼마전에 들어온 부엌일하는 영동댁 딸래미를 희롱하다
주인장 눈에 발각되어 쫏겨난 신세다. 그래도 꼴에 돈푼께나 있다고 깝쭈대기는 .... 각설하고 사람과 사람이 마주하면 서로 말을 건네는 것이 이치다.
먼저 낙향거사가 "스님 어디 가시유" "네 장에 갑니다" "스님이 장이라 ㅎㅎ" "우리도 다같이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요 ㅎㅎ" 가벼운 말이 오가고
이번에는 스님이 운을 땐다... " 보아하니 한양분 같은데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오만"...
"그렇소이까~ 뭐 조금~" 스님이 무언가 생각에 잠기더니..... "댁의 관상을 보아하니 내년 정월 그믐날 그 명운을 다 할 것 같소이다"......
이 무슨 청천벼락 같은 소리인고?
시와인드
(순천 정원 2015)
불전함 (5)
개나리 봇짐을 배고 뒤로 몸을 젖힌채 다리를 꼬우고 누워 거드름을 피우던 낙향거사넘이 후다닥 일어나며 "뭐라꼬오~내년 정월 그믐날~" 사색이 되어
스님의 소매자락을 부여 잡는다. "참말이요 무슨 방도는 없겠소" 스님은 태연하게 "하늘이 내린 명운에 방도는 무슨 방도가 있겠소" 하고 길을 떠나려
일어서는데 낙향거사넘 행색이 더욱 초라하다. 낙향거사넘을 따르던 일행들도 눈빛이 예전 눈빛이 아니고 슬금 슬금 꽁무니를 뺀다.
"무정아 이제 그만 가자꾸나" "네 스님" 노승이 길 떠날 채비를 하자 낙향거사넘이 더욱 안달이 난다."여보시우 스님 좀 자상하게 이야기 해 보시우, 방도를
일러 주고 떠나야지 그냥은 아니 되우" 낙향거사넘은 노승의 옷자락을 꽉 붙들고 막무가내다.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 노승이 체념한 듯 털썩 주저 앉아 낙향
거사넘과 다시 이야기를 이어 간다. "내 산중에서 수도중인 미승으로 어찌 천기를 누설 하리오마는 그대 사정이 하도 딱하여 한가지 방책을 일러 주리다"
귀가 쫑긋한 낙향거사넘이 턱을 들이댄다. 앞으로 달포 뒤 둥근달이 뜨거든 태백산 상상봉에 홀로 올라가시오. 그기에서 거죽쓴 노인을 만날거외다.
이 노인을 뒤도 돌아보지 말고 곧장 나아가면 천길절벽에 붉은색 꽃이 한송이 피어 있을것이니 그 꽃을 꺽어 오면 혹시 명운이 조금 늘어날까도 싶소이다"
말하기가 무섭게 노승은 답도 듣지 않고 저만치 떠나 가버린다...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나리다.
이리 북적대는 시장통도 해가 기울고 어둠이 내리면 다시금 조용함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인간세상도 마찬가지다. 봄꽃처럼 활짝 피었다가 한철 지나가면
시들고 낙엽이 되어 찬바람 한 줄기에 흩날리는게 세상의 흐름이고 진리다. 많이 가졌다고 자랑말고 적게 가졌다고 슬퍼말라. 마음이 고요하면 그로서
족하다. 노승과 무정이도 억겁의 시간속에서 만난 작은 인연일 뿐이다...시장구경을 하고 있는 노승과 무정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으니....
시와인드
(함양 백운산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