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최가밥상 2016.2)
욕망
우리가 사노라면 크고 작은 일과 무수한 사람들의 연결속에서 삶을 영위한다. 동서고금의 이렇다 할 석학들이나 철학자들 위정자들 모두가
이 연결속에 있다. 사람은 욕망이 있다. 그래서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노력한다. 욕망이라는 항아리를 채우기 위하여 끝없이 움직인다.
욕망의 끝은 어디인가? 그 끝은 없다.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욕망의 주체는 자기자신이다.
우리 속담에 팥 심은데 팥나고 콩 심은데 콩 난다고 한다. 팥 심은데 콩이 나거나 콩 심은데 팥이 난다면 논리상 어긋난다. 욕망 이야기 하다가
뚱딴지 같은 팥콩 타령이냐? 팥을 심은 농부는 팥을 수확하고, 콩을 심은 농부는 콩을 거두어 간다. 여기서 바꾸어 거두어 가기를 바라는 농심은
없다. 그런데 욕망의 늪에 빠진 사람들은 콩을 심어 놓고 팥을 기대하거나 팥을 심어 놓고 콩을 기대하기도 한다.
바보다. 삶의 형체가 여러 가지이고 복잡할 것 같아도 아주 간단한 법칙에서 기인한다. 사람의 생명도 세포 분열이 하나에서 시작하여 둘 넷으로
점차 일어나 종국에는 생명으로 나타난다. 인류의 역사는 욕망으로부터 시작된다. 욕망은 꼭 나쁘다고 단정 지을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정도가
문제이다. 욕망은 순기능을 하여 문화나 역사를 창조하고 발전시키기도 한다.
질량 불변의 법칙이 있듯이 욕망 불변의 법칙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욕망과 욕망이 부딛히면 싸우거나 다툰다. 욕망과 욕망 사이에서
조절하는 기능은 배려와 이해와 공감과 사랑과 봉사정신이다. 욕망을 취하려고만 한다면 하루종일 뙤약볕에 쟁기질을 하는 소나 다름 없다.
우둔하다는 이야기다. 사람의 욕망은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해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