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야

아이야 이제 가거라. 아빠가 없는 그때를 대비하여 떨어져서 살아가는 방법을 찾거라. 여태 어미 아비 속에서 보내온 터라 우선은 힘도 들겠지만 지금까지 잘 해 오고 있단다. 이글을 네가 읽을지 모르겠다. 마음의 편지니 마음으로 갔을게다.

언제인가 아빠가 이런 글 보냈었지. 아마 거제도 있을 때였지. 페레스트로이카 배 타고 오가며. 새벽에 집을 나설 때 곤하게 자고 있는 네 머리맡에 이제 게살 지기지 말고 동생도 잘 봐 주라고 그래 참 세월 빠르재.

어느 지인이 선물해준 이쁜 겨울 옷을 입으면 넌 바로 세상 제일가는 모델이었지. 수승대 구연교 아래서 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은 지금 보아도 명품이구나. 사람은 자라면서 살면서 성장하고 발전하고 바뀐다.

이번에 예취기 하나 새로 샀어. 돈은 좀 들였지만 가볍고 풀도 잘 나가고 좋으네. 동생들이 셋이나 있지만 아무도 관심이 없어. 아빠 혼자 할아버지 생전 하시던 말씀 생각나서 빠짐없이 벌초를 한다.

벌초는 추석무렵 한번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 오늘도 산소 주변 잡목부터 잘랐지. 새 예취기라 힘은 들어도 일견 재미도 있어. 근데 아침에 큰일 날뻔 했어. 한참 풀 깍는데 벌이 나오더라.

벌도 시커멓게 큰벌이라. 땅속에 사는 땅벌. 아빠는 벌을 많이 타서 지난번 원동에서 눈 두덩에 한방 쏘였는데 얼굴이 퉁퉁 부어 선풍기 아줌마가 되었어.

얼른 뒷걸음쳐 빠져나오고 킬러를 뿌렸는데 허벅지 한방 쏘였어. 따갑고 아프고 내려와 보니 벌걷게 쏘인자국에 피도 나고 그래도 이만하기 정말 다행이라. 다음에는 벌 방호복을 사 입던지 해야겠어.

이야기가 옆으로 흘렀네. 할아버지는 항상 그리 말씀하셨지. 고향에 오면 뒷골 작은할아버지 들여다보고 산소에 할머니 할아버지 뵙고 오라고. 이제는 그분들도 돌아가시고 한세대가 바뀌었지.

아빠는 다음 세대에 그런 주문을 안할거라. 왜냐하면 말해도 잘 안들을 것 같아서. 아빠는 아빠 길이나 열심히 가려고 해. 아빠가 먼저 세상을 살아보니 군대 다녀 오면 어른인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취직하고 결혼하면 어른인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딸시집 보내면 어른인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손주 낳아 손주 말하고 유치원 가면 어른인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직장 퇴직하면 어른인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인생은 경험하지 않으면 끝까지 모르나봐. 두팔 벌려 푸른 하늘 안아봐. 뭐가 안기나. 하나도 안은게 없지. 수신제가. 가화만사성. 연목구어. 과유불급. 이런 말들이 생각난다.

나는 너에게 참 고마워. 나를 즐겁게 때로는 기쁘게 해 주었으니까. 웃는 표정. 시원한 음성. 타고난 명품감각. 끝까지 해보는 도전정신. 아껴 쓰는 착한 심성. 그래서 꽃향기 그윽한 뜰이 더 아름답다.

시와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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