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 wind 2019. 2. 9. 10:15

(가을 좌광천 2016)


조선의 인구


조선 초기 500만 명을 넘지 못했던 조선시대의 인구는 조선 중기 현종(顯宗) 때인 1669년에 겨우 500만을 넘었다. 그러나 돌림병과 역질이 돌 때마다

인구가 크게 줄어 30년 전의 인구로 되돌아가는 모습이 발견된다. 영조(英祖) 중반기에 인구 700만을 돌파한 조선의 인구는 순조(純祖) 17년(1817)에

서야 800만 돌파를 목전에 두게 되었다.

조선 초기인 태종(太宗) 4년(1404) 4월 25일 호조(戶曹)에서 각 도의 전답과 호구 수를 보고한 내용이 발견되었다. 이 시절에 충청도는 1만 9,561호에

인구는 4만 4,476명, 전라도는 1만 5,703호에 인구가 3만 9,151명, 경상도는 4만 8,992호에 인구는 9만8,915명, 풍해도(황해도)는 1만 4,170호에 인구는

2만 9,441명, 강원도는 1만 5,879호에 인구가 2만 9,238명, 동북면은 1만 1,311호에 인구가 2만 8,693명, 서북면은 2만 7,788호에 인구가 5만 2,872명

으로 조사됐다.

연산군 9년(1503) 2월 9일에는 한성부에서 "정월부터 2월 5일까지 도성(서울) 안팎의 출생자는 120명, 사망 470명이라는 보고 자료가 발견됐다.
중종14년(1519)에는 가구수 754,146호 인구 3,745,481명으로 조사되었다.

인조 17년(1639)에는 44만 1,827호에 152만 1,165명과 효종 5년(1654) 가구수 62만 8,603호 인구 204만 7,261명으로 이는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영향 때문이다.

조선 중기에 해당하는 현종개수실록 10년(1669) 12월 29일의 기록에 의하면 한양과 지방의 호수는 134만 2,074호이고, 인구는 516만 4,524명으로

집계되었다.

현종 13년(1672) 10월 30일 실록에 의하면 호수는 117만 6,917호이고 인구는 469만 5,611명. 이 중 남자가 254만 1,552명, 여자가 215만 4,059명이었다.

3년 전에 비해 인구는 무려 46만 8,913명, 호수는 16만 5,157호나 줄어든 이유는 무엇일까. 그 비밀은 “신해년(1671)의 기근과 전염병에 죽은 백성이

즐비하고 떠돌아다니는 자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과연 조선시대에 전염병이 어느 정도로 맹위를 떨쳤기에 '죽은 백성이 즐비하다'는 표현을 썼을까. 조선시대에는 종기도 목숨을 거두어가는

시절이었으니 전염병이라면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숙종(肅宗) 44년(1718) 1월 15일 충청도 각 고을 백성들 가운데 전염병을 앓는 자가 2,140명, 사망자 642명, 함경도 각 고을에 염병(장티푸스)을

앓는 자가 4,570명, 사망자 1,243명. 숙종 45년(1719) 1월 2일 충청도에서 각 고을마다 염병을 앓는 자가 1,643명, 사망 240명

(온 집안이 몰사한 경우가 4호). 평안도에서 염병을 앓는 자가 8,348명, 사망 1,380명이었다. 이런 기록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당시엔 계절을

가리지 않고 전염병이 기승을 부려 피해가 더욱 컸음을 알 수 있다.

1821년(순조 21)에서 1822년 사이에 유행했던 콜레라로 인한 사망자는 평양에 수만 명, 서울에 13만 명으로 전국으로 따지면 수십만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정조(正祖)가 사망하기 1년 전인 1823년에 전염병이 돌았던 적이 있다. 이해 전국의 사망자는 모두 12만 8천여 명이었다

('정조실록' 23년 1월 13일).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조선시대 천연두·장티푸스·콜레라는 3대 전염병으로 이 세 전염병은 번갈아 등장하여

대학살을 자행했다.

1859년(철종 10)에서 1860년에도 콜레라가 크게 유행했는데, 이때의 사망자는 40만 명이었다. 서양 중세의 흑사병(페스트)만 무서웠던 것이 아니다.

특히 정조 23년 유행한 전염병에는 정치인들의 죽음이 눈에 띈다. 1월 7일에 김종수(金鍾秀-좌의정)가, 18일에 채제공(蔡濟恭-영의정)과

서호수(徐浩修-판서)가 죽었다. 김종수는 노론의 영수, 채제공은 남인의 영수였고 서호수는 이 시기 권력의 중심에 있던 소론 서명응(徐命膺)의

아들이었다.

전염병으로 인해 각 당파의 거두들이 죽고, 그로부터 7개월 뒤에는 정조가 종기 때문에 죽었다.
당쟁의 지도가 일순 바뀐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질병에 의해 역사가 바뀐 것이다. 어쨌거나 전염병은 조선 후기 민간인 사망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처럼 돌림병이 시도 때도 없이 돌았으니 인구증가율이 옆으로 게걸음을 한 것도 이해가 간다.
숙종 1년(1675) 10월 27일 실록에 의하면 '서울과 8도를 합하여 호수가 123만 4,512호이고 인구가 470만 355명'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42년 후인 숙종 43년(1717) 11월 14일 실록에 의하면 전국의 호수 총계는 155만 7,709호, 인구는 683만 9,771명으로 나타나 있다. 온갖 전염병과 기근,

괴질과 역질이 차례로 돌았음에도 불구하고 42년 만에 호수는 32만여 호, 인구는 213만여 명이 늘었다.

영조 8년(1732)에는 가구수 171만 3,849호에 인구 7,273,446명이었고, 영조 23년(1747) 12월 28일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서울의 호수는 3만 4153호,

인구는 18만 2,584명이며 8도의 호수는 172만 5,538호, 인구는 734만 318명(남 353만 9,107명, 여 380만 1,211명)이었다. 이때 비로소 인구가

700만을 넘게 된다.

그러나 정조 1년(1777) 실록을 보면 호수가 117만 5,371호, 인구는 723만 8,523명으로 오히려 영조 시절보다 호수는 55만, 인구는 11만 명 정도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각종 전염병이나 기근으로 인한 떼죽음의 결과가 아닌가 추측된다. 정조 시절에도 인구증가율이 옆으로 게걸음을

계속했는데, 이때도 질병과 기근이 반복되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순조 17년(1817) 12월 29일엔 전국의 호수가 163만 718호, 인구가 790만 3,167명으로 800만 돌파를 목전에 두게 된다. 그러나 순조 28년(1828)

섣달 그믐날 기준 인구조사가 있었는데 가구 152만 7,608호 인구664만 4,408명(남:332만 5,221명. 여:331만 9,261명)으로 다시 가구와 인구가 줄었다.

이는 순조시대에 전국에 걸쳐 대형 화재와 홍수 그리고 전염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1910년 가구수 280만 4,103호 인구 1천 331만 3,017명

으로 조사되어 1천만 시대에 접어들었다.

조선시대의 인구를 전공한 학자들 의견에 따르면 조선의 인구통계는 실록의 기사를 그대로 신봉할 수 없는 측면이 많다고 한다. 그 이유는 첫째

오늘과 같이 정교한 인구센서스를 행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미흡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둘째 조선시대의 호구조사는 과세대상을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16~ 60세까지의 장정만 계산되고 노인과 어린이, 노비와 여자들이 빠졌을 가능성이 있다. 셋째 과세대상에서 빠지기 위해 고의로 누락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조선은 1392년부터 1910년까지 518년간 27대에 걸쳐 집권한 왕조다. 개국초기에 지금의 남북한을 합쳐서 인구 500만이다. 오늘날 인구가 남한

5,200만 북한 2,500만 합쳐서 7,700만이 넘었으니 비교된다. 저 500만 중에 우리들의 조상도 한분이 있다.


시와인드